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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주부가 된지 1년 6개월 #4 방음실과 발을 디딜 수 없는 창고방

by 여목_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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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무실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결정하고 가장 먼저 한것은 집에 방음공사를 하기 위해 견적을 내는 일이었다. 2020년 1월 초에는 집에 방음실을 설치를 하기 위해 권이 방을 비워야 했다. 권이 방은 그야말로 난장판. 수납이 적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엄청나게 많은 책과 장난감, 그리고 보드 게임들이 어지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소용돌이의 핵심에는 벙커침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권이가 어렸을 때 사용하던 침대인데 아래층은 커튼을 열고 들어가 놀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침대가 나오는 나무로 짜인 구조물이었다. 어른은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지만 아이들은 아래위를 오르락거리며 재밌게 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실제 며칠 그렇게 놀기는 했다. 그러나 아래층이 너무 어둡고 혼자 놀다 보니 잘 들어가지 않았고 잘 때만 이용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침대는 잘 이용하고 있었네. 아래층은 안 쓰는 이불들로 가득 채워졌다.

권이는 엄마와 자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엄마 침대에서 (고의로) 잠이 들면 가끔은 내가 2층 침대에 올라와 혼자 자기도 했다. 드디어 나의 어렸을 때 꿈을 이루는 순간! 은 아니고 어른이 올라가면 출렁거릴 정도로 약한 구조물이었으므로 자는 내내 배에 타는 기분이 들어 어느 날은 해적선이 등장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갑판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현실 반영이 잘 된 꿈을 꾸었다.

방음실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권이방의 모든 물건을 정리해서 창고 방으로 옮겨야 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정리가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피아노가 문 옆에 딱 붙어있었고 한쪽 벽면 전체는 권이 책과 장난감이 꾸깃꾸깃 가득 차 있었다. 맞은편 벽장은 작은 창고처럼 생긴 수납공간이 있어서 문을 열고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방에는 물건을 쌓아(만) 놓고 다시는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그런데 이런 방에 권이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쑤셔 넣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수납할 공간은 마련해야 했으므로 간략하게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이 딱히 있는 건 아니어서 그냥 구석으로 밀어서 물건을 층층이 쌓은 후 정리는 늘 그랬듯 나중에 하기로 했다. 벙커침대는 분리하여 버리기로 했고 힘겹게 분리를 했다. 아래층의 이불을 모두 빼서 옮겨두고 권이 옷장과 장난감, 그리고 갖가지 보드게임까지 창고방으로 전부 밀어 넣었다. 들어는 가더라. 발을 디딜 수는 없었다.

권이방을 싹 비우고 나서야 방음실을 설치할 방이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는 업체에 방음실 견적을 내고 날짜가 되어 시공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직원 세 분이 오셔서 사다리차로 오전 내내 자재를 올리고 거실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거실은 쓰레기통 이전의 상황이었으므로 충분히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방음실 설치 작업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방 하나에 방음실을 넣기 때문에 4면 벽과 천정, 바닥까지 모두 공사하는,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방음실 문을 달면 이제는 더 이상 큰 물건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창고방의 피아노를 공사 중간에 옮겨서 방음실에 넣었다. 다행히 세명이나 있어서 창고방을 헤치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800 테이블도 하나 넣었다. 방음문을 설치하고 전기 설비와 조명까지 모두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내가 손대지 않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구나. 프로는 역시 프로다. 벽의 두께도 있었고 천장과 바닥까지 설치되어 있어 공간이 좁게 느껴졌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방음실에 권이와 들어와 함께 피아노를 쳤다. 튜닝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권이는 평소 배우던 피아노 곡을 외워서 연습해보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피아노 연주는 엄청나게 즐거웠다. 과분하게도 이러한 공간이 하루아침에 둘이나 생겼다. 깔끔하고 좁아진 방음실, 그리고 발을 디딜 수 없는 창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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