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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주부가 된지 1년 6개월 #3 거대한 쓰레기통

by 여목_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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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은 카테고리 설정을 하는 것과 자동화로 이루어진다. 그 후에는 보기좋게 정리정돈 하는 것과 최소한의 에너지만 사용하여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지보수 과정이 필요하다. 즉 정리의 맨 처음에는 물건의 카테고리를 설정하여 어떤 물건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동선이 꼬이지도 않고 다니면서 불편한 것도 없어진다. 그렇게 정리가 되면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집안일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빨래는 이미 자동화가 완료된 부분이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나의 일손을 덜어낼 부분이 바로 설거지와 청소였다. 이것은 식기세척기와 로봇청소기의 도입이 나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마지막으로 남은것은 집안을 꾸준히 관리할 수 있도록 내 삶과 행동의 일정 부분을 수정하는 일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해내기 힘든 부분이지만, 주부로서 응당 가져야 하는 도덕적 마인드와 깔끔한 집안을 만들기 위해 나를 단련하고 훈련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내면의 성장과도 일면 통하는 점이 있고, 가끔은 나의 게임 시간도 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필요도 있었기에 기꺼이 도전하기로 했다. 

잠시 허황된 꿈을 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발디딜틈이 없어져버린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연식이 좀 된 아파트는 보통 거실보다 방은 크게 빼는 스타일이었으므로 우리집도 거실은 작았다. 눈앞에는 좁아터진 거실에 책상 네개와 의자, 그외의 자잘한 박스들, 사무실에서 가져온 조명세트, 소형 앵글 세 세트, 권이가 쓰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온 책상 하나 더, 권이 방에 책상을 넣느라 빼놓은 짐, 그리고 (어디선가 얻어온)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있는 이삿짐 박스 까지. 온갖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말로만 발디딜 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발을 디딜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베란다쪽으로 어떻게 가지? 

사무실 정리를 한 번에 이삿짐 나르듯 한 것은 아니다. 몇 달에 걸쳐 물건을 정리하고 집으로 가져오기를 매일 반복했다. 레슨이 끝나는 저녁 시간에 지하에서 가져가야 하는 물건을 올려 차에 싣고 남는 공간에는 자잘한 물건으로 가득찬 이삿짐 박스를 넣어 잘 고정해 둔다. 티구안은 모든 의자를 접으면 일반 사무용 책상도 겹쳐서 들어갈 정도로 공간이 넓다. 매일같이 그렇게 짐을 옮겼다. 짐은 옮겨도 옮겨도 끝이 없었다. 사무실에서도 버려야 하는 물건들이 많아 계속 내다 버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물건은 계속 나왔다. 사업을 10년치 하면 물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사무실에서 버린 것만 용달 두 트럭분량이 나왔다. 매일매일 집으로 한 차 분량의 물건들을 가지고 오다보니 좁아터진 거실은 물건들이 계속 쌓이고 쌓여 거대한 쓰레기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집에는 3천 권의 책을 넣을 공간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사무실에서 책장을 여섯개 가지고 가야하는 상황인데 그걸 용달로 실어나르려면 일단 책장 여섯 개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퇴실 날짜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거실의 거대한 쓰레기통을 급하게 분리수거해야만 책장과 책을 옮길 수 있었다. 카테고리고 나발이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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