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다보니 걷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집중해서 걸으면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해마가 발달한다는 것이다. 하루 30분씩 걷는정도로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TV속 참가자들은 인지능력이 조금씩 향상 되었다. 내가 일하는 연남동 사무실 옆에는 홍대입구역 3번출구에서부터 경의중앙선 가좌역까지 연결된 길다란 공원이 최근 개장을 하였다. 걸음걸이로 25분가량 걸리는 좁고 길다란 공원이다. 그런데 여기를 꽤나 잘 만들어 두어 조그만 시냇물도 그럴듯하게 흐르고 있고 잔디밭도 넓찍하게 두어 사람들이 오고가며 편하게 공원을 조성하였다. 나도 그 길을 왕복으로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점심시간을 들여 걷기로 하였다.
사실 그 전에 이 길을 걸어본 경험이 있다. 세 명 정도 모이는 작은 독서모임을 연남동에서 진행했었는데 2+1 탄산수를 들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고 탄산수를 들고 아주 느릿하게 걷다보니 이게 정말 그럴듯하게 예쁘게 만들어진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작위적으로 나무를 심어두거나 잔디를 보호합시다 푯말 하나 없이 자유로웠다. 높은 나무들이 열을 맞추어 아름답고 우아하게 서 있었으며 그 앞에 폭이 1m 정도나 될까. 생각지도 못하게 그럴듯한 작은 시냇물은 물도 굉장히 깨끗했고 또 아기자기하게 흐르고 있었다. 근처 홍제천을 흐르는 물을 받아 들어오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깨끗해서 놀랐고 주변 정리가 정말 시냇가처럼 흙으로 되어 있어 놀랐고, 아이들이 어우러저 시냇물 속에서 뛰어 노는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놀랐다. 생긴지가 그래도 한두달은 더 되었었는데 이런 공원을 지척에 두고 지하 사무실에 쳐박혀 끙끙대며 안 풀리는 일들을 붙잡고 있던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점심을 30분정도 일찍 먹고 연남 파출소를 지나 공원으로 접어들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점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는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하지는 않고 그저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흐르는 냇물을 보았고 소금쟁이를 보았고 갓난 아기같이 작은 손주들을 데리고 나온 할머니들을 보았다. 아기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옹알이를 하듯 작고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유모차 속에 있었는데 할머니는 나무 그늘이 있는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아기와 함께 벌렁 누워 싱그러운 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젊은 남녀는 길게 늘어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사이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음악을 들으며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낮시간은 조용했고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나는 잔디를 가로질러 가장자리로 들어가 흙으로 된 길을 걸었다. 흙을 밟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흙 사이 군데군데 엉성하게 자라있는 잔디들을 밟는 느낌이 생소하다. 그리고 아늑하다.
천천히 걸으니 왕복 40분가량 걸렸는데 다양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것은 기분을 환기시킨다거나 바람을 쐰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정신적 청량감을 주었다. 새로운 것들이 이전 것들을 정리해주는 그런 느낌이다. 그렇다고 머리속에 들어있는 일들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딱딱 맞춰서 정리가 알아서 됐다는 것은 아니다. 혼재한 상황들이 차분해진 느낌, 머릿속 성난 망아지들이 얌전해진 느낌, 기억들이 머리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주엔 그렇게 점심 시간을 할애해 4일을 걸었다. 걷는 느낌은 매일매일 다르고 또 차분했다. 빠르게 걷기가 아니라 느리게 걸으니 뱃살은 그대로, 차분한 마음은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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