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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밥을 짓는 것

by 여목_ 2020.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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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에 쌀을 두 컵 넣고 정수기에서 두 컵 분량의 물을 받아 쌀을 씻는다. 뽀얀 쌀뜨물을 비우고 그렇게 다시 두세 번을 반복한다. 마지막에는 두 컵 분량의 물을 받아 밥솥에 올린 후 백미 버튼을 누르면 30분 후에는 세 명 먹을 밥이 딱 완성된다. 세상은 단순해졌고 그만큼 가벼워졌으며 쉬워졌다. 

작년에는 아내가 휴직을 했다. 아내는 즐겁게 한 해를 쉬었고 올해 복직을 했다. 올해는 내가 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원래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휴직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집에 있기로 했다. 작업실도 모두 정리하고 사무실 짐을 집으로 옮겼으며 이사 온 물건 때문에 집이 터져나갈 지경이 되었다. 정리, 정리, 정리 한 달은 꼬박 걸릴 일이다. 개인 일을 하면서 올해 4학년이 될 남자아이와 함께 집에 있을 예정이다. 마흔셋에 주부가 된다. 

쿠쿠가 맛있는 밥을 다 지으면 밥을 솎은 후 뚜껑을 다시 덮는다. 공기를 넣어 밥을 고슬고슬하게 만든다. 밥을 짓는 것엔 별다른 기술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실력이 없으니 못 한다. 미세한 불 조절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떠한 조작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적당한 밥이 척하고 나오는 그런 장비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아는 형과 밥으로 유명한 종로의 밥집에 간 일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밥 냄새가 확 난다. 뭔가 있구나 이 집은. 들어가면 바로 커다란 압력 밥솥이 두 갠가 있고 그 위에서는 밥이 계속 지어지고 있다. 우리는 제육을 시켰다. 밥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므로 주문이 밀리는 것 같았다. 조금 기다리니 준비된 식사가 나왔는데 예쁘게 쌓아 올린 밥알에 시선을 빼앗겼다. 숟갈로 한입을 떠먹으니 밥 맛이 정말 다르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그런 맛이다. 이런 밥을 언젠가는 먹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뜨거운 향과 높은 밀도의 밥알을 한 올 한 올 씹으면서 엄마 생각도, 교회 뒤편에서 밥과 국을 짓던 권사님들 생각도 났다. 식구들끼리 저녁밥을 먹으며 이야기도 하고 티브이도 보던 옛날이 떠오르는 걸 보면 밥은 나에게 있어 추억에 깃든 맛이기도 하다. 

지난 1년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평일에 집에서 저녁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사업을 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난해가 가장 바빴다. 새벽에 들어오고 아침 느지막이 나가면 가족들과 밥 한 번 같이 먹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을 못 보면 서로 소원해지는 게 사람이다. 밖에서 맛있는 밥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것이고 딱히 누군가가 생각나지도 않는다. 빨리 밥 먹고 일해야 되니까 일에 쫓기면 감정도 망가진다. 가족 간의 관계나 신뢰가 나쁘지 않아도 이렇게 오랫동안 멀어지면 배가 파도에 떠밀리는 것처럼 어느새 육지와 멀어지는 법이다. 이미 나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아내가 복직하기 며칠 전,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된 된장찌개 조리법을 이용하여 찌개를 끓여 점심을 같이 먹었다. 휴직한 기간 내내 아내는 점심때 뭔가를 해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자신에게 소홀하지 말라는 말을 된장찌개와 함께 건넸다. 나에게는 이것이 감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점심 식사였고 많은 이야기를 했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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